2017년 6월 18일 설교

June 18, 2017

 

                                  “소원을 바꾸는가?” (삼하 23:13-23 ‘소원을 바꾸는 다윗 왕’) 17.6.18.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의 제자들 중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황태자로 훗날 왕좌에 오른 인물인데, 그에게 수학수업은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유클리드 선생님께 물었단다. “좀 더 쉬운 방법으로 기하학을 가르쳐줄 수 없나요?” 그때 유클리드의 입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을 두고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 튀어나왔다. “배움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이치를 가르치셨지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높은 벼슬아치나 천한 자, 부자나 가난한 자,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는 길이 왕도라는 거다.

   포장도로는 깨끗하고 편리하다. 그런데도 포장도로를 외면하고 흙탕길을 고집한다면 우둔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세상풍조의 길, 영혼멸망의 길, 정욕과 미움으로 마음살인을 하는 길 등등 엉망진창길을 비틀대며 걸어가곤 한다. 흙탕길은 흙으로는 새로워질 수 없고 아스팔트를 덮을 때 완전히 새 길로 변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죄들을 철저하게 숨기고 부인하였지만 범죄 사실들이 인정되어 탄핵을 당하고 지금 감옥에 있다. 지금도 변호전문 변호사를 세우고 자신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딴 그림’을 그렸다지만 과거 죄들은 덮어지지 않는다. 흙탕길을 흙으로 덮어놓으면 다시 흙탕길이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설교본문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 맞게 신앙관을 고치는 다윗 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고 좋은 깨달음을 건지는 시간이길 바란다. 오늘 설교본문은 2주일 전에 예고하여 놓았으니까 그 동안 읽고 묵상해온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다윗 왕의 장수들 가운데 제2진을 소개하여 놓은 것이다. 제2진 장수들은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한 명은 익명으로 남겨두고, 16절에 보면 이 세 장수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 세 장수가 블레셋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우물물을 길러다 다윗 왕에게 바친 일을 용맹담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 우물물 사건이 왜 그렇게 용맹담이 되는지 납득할 수 있나요? 우리는 설명을 조금 더 자상하게 들을 부분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블레셋진영이란 점이다(삼상 13:19-22.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르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는데’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는 산업사회임<17:5-7,45> 사울 왕 시대라고 하지만 전투무기도 현저한 차이를 이룰 수밖에 없었겠지요).

   창세기 제1장 2장에 나오는 창조편을 읽어보면 대충 5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세상을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둘째는 여섯째 날까지 단계적으로 창조하셨다. 셋째는 최종단계 때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청지기 직분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사랑을 나누실 대상으로 우주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홍수심판으로 끝난 게 아니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재림 때까지 간다. 그러기에 성령님의 가르침을 따라 창조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장이 되지 못한다.

    ‘가난한 자(貧者)의 성인’로 불리는 마더 테레사(1910-1997)는 함께 일할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으로 늘 세 가지를 물었단다. “잘 웃나요?” “잘 먹나요?” “잠은 잘 자나요?” 이 세 질문은 테레사 수녀가 평소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았던 항목들인데요, 소득은 엄청 높아져서 삶은 편리해가지만 세상은 더 복잡하고 힘들어져 간다. 사람들은 미소를 머금고 넉넉한 마음으로 마음 둘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숨짓는 소식들은 끊어지질 않는데도 맥 빠지게 하는 욕심 채우기는 계속되네요.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부자로만 사는 게 아니라 의미 있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삶은 필요하고 값지지요. 그런데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강경화 후보자, 우병우 전 민정 수석이 이것을 모를 수 없다. 대단하다고 요란하더니만 이제 와서 가짜로 판명되고 있으니 허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다윗 왕의 제2진 용사들을 존경하며 다윗 왕을 부러워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 그러면 이토록 명품장수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설교본문에 정답이 있다. 함께 찾아보자.

    1) 이런 일(17)

    우리가 지금 함께 읽어본 17절에는 ‘이런 일’이란 말씀이 2번 나온다(“Far be it from me, O LORD, to do this!” he said. -NIV-). 멀리 떨어져 위치<존재>하도록! 그래서 상관없이 살아가겠다고 다윗 왕이 신앙적으로 결심한 용단을 ‘이런 일’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레 17:10-11.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말씀에 맞게 다윗 왕도 성령님의 생각나게 하심을 따라 우물물을 피로 인정하고 ‘여호와께 부어드리며’<16下>라고 했던 것임. 간음을 하고 살인을 했지만 이런 순종의 결단을 크게 보시는 하나님!).

    중세교회는 천국 입국표를 팔아먹는 장사꾼교회로 변질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 구호 중 하나가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이었는데, 현재 한국교회는 어떤가? 교회들의 생각 속에 성경이 살아있나요? 성경이 살아 있는 교회는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갖게 된다. 첫째, 사랑이 꿈틀거린다. 즉 세상 무엇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함이 나타난다. 중세교회는 하나님과 이웃보다도 돈과 자신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둘째 특징 ‘복음전파가 이루어지 못했다.

    눅 10:19에 보면, 예수님이 전도자 칠십 인에게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δυναμιs power ‘힘’, εξουσια authority ‘권세’라는 뜻인데; ‘εκ’와 ‘ουσια’의 합성어로써 ‘에크’<εκ = ‘∼으로부터’>, ‘우시아’<ουσια = ‘본질’>을 말한다. 그렇다면 권능은 본질에서 나오는 그것이다! 본질을 회복하면 성령충만이다. 우리도 70인처럼 본질회복을 사모하고 실제로 이루길 축복한다. 아멘.

    2) 아비새(18)

    아비새 장수는 다윗에게 평생 못 잊게 하는 더러운 속을 보여줬던 적이 있었다(삼상 26:6, 9-12). ‘다윗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블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나이다... 죽이지 말라...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이러한 기회주의자 아비새를 다윗 왕은 제2진 장수들 우두머리로 임명하였으니 다윗 왕은 용서할 줄 아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들의 이름은 각각 ‘모두가’ ‘누군가’ ‘누구나’ ‘아무도’였단다. 중요한 일이 위급하게 생겨 모두 그 일을 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누군가’가 하리라고 모두 확신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안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모두 생각했지만, 모두 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모두 ‘누군가’만 꾸짖었고 누구나 자원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은 채 끝났다. 그 위급한 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네 사람이 다투고 있단다. 우리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인가? 아니 그 네 사람 중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은 누굴까? 대단하다고 우쭐대지만 눈치 빠르게 저울질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흔하다. ‘모두가’ ‘누군가’ ‘누구나’ ‘아무도’는 바로 나일 수 있다. 왜 하필 나이냐고? ‘누군가’가 할 텐데. 책임을 맡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시종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나라가 지금 우리사회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확실하게 다른가? 저와 여러분은 아비새 양심을 십자가에 못 박길 축복한다. 아멘.

    3)삼십 명(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브나야를 평가한 말이다. 그렇다면 삼하 8:18을 찾아가보자.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15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 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 사령관이 되고’

우리는 ‘정의와 공의’의 정권에서 군 사령관에 올랐던 요압 장수가 탈락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용맹은 역발산기개세(力發山氣蓋世 항우 : 힘은 산을 뽑고 하늘을 덮을 만 했지만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40만의 대군을 가지고도 유방의 심리전(四面楚歌)에 속아 자결했음.

   다윗 왕은 ‘力發山氣蓋世항우’를 버렸다! ‘베들레헴’(삼상 16:4, 11<다윗고향. 고향우물 맛을 못 잊어 했음! ‘소원’ אוה long for, desire, longing, lust. ‘David grew homesick’ -GN-. 개인적인 욕구충동을 만족시키는 용맹을 단 칼에 잘라 하나님께 부어 바친 신앙인이 다윗 왕이었음. 사적인 취향과 성품, 체질적인 습관을 과감하게 끊고 돌아섰던 이런 걸 배우자).

    자동차는 시동을 건 뒤에 전진기어를 넣고 가속패달을 밟으면 차가 앞으로 가고, 후진기어를 넣고 패달을 밟으면 차는 뒤로 간다. 같은 자동차에, 똑같은 패달인데도, 기어에 따라 차의 움직임이 결정된다. 인간도 관(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잔잔한 호수에 돛단배가 둘 있는데, 남풍이 분다. 그런데 한 돛단배는 동쪽으로 가는데, 다른 돛단배가 서쪽으로 갈 수 있다. 어찌 그런 일이 생기는가? 그럴 수 있다.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를 동쪽으로 돌리면 배는 동쪽으로 가고, 키를 서쪽으로 돌리면 배가 서쪽으로 간다. 사람의 판단은 배의 키와 같다. 판단을 성령의 것!

    자 이제 오늘 설교가 우리 자신의 중심을 비춰준 그 부분을 챙기자. 별로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괜찮고 부끄러운 부분도 귀한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다윗 왕이 소원을 잘라 바꾸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비새를 등용하고 요압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우리도 다윗의 이런 점을 배우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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