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17년 4월 23일 설교

"찬양하는 이유를 알차게!”(삼하 22:1-10 ‘다윗의 찬양중심’) 17.4.23.

헨리 무어라는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다가 다시는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낙심에 빠진 적이 있었단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목사님을 배신하고 떠날 때,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오히려 거짓소문을 퍼뜨리고 다른 교회로 옮기는 일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어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계속 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단다.

어느 날 소파에 앉아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딸이 거실로 나와서 엄마를 찾더란다. “엄마는 지금 2층에 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니?”하고 물었더니, 딸이 “엄마에게 전해 줄 게 있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자기가 대신 갖다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딸은 계속 자신이 직접 가져다줄 거라고 우기기에, “네가 휠체어를 타고 계단을 오른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니?”라고 설득했지만, 오히려 딸이 아버지를 설득시켰는데 이런 대답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제가 이번 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한 성적표에요. 꼭 제 손으로 직접 엄마에게 전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성적표를 들고 있는 저를 아빠가 안고 엄마에게 가 주세요. 그러면 되잖아요?”“성적표를 들고 있는 저를 아빠가 안고 엄마에게 가 주세요.” 이 말이 무어 목사님에게는 “어떠한 문제를 들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만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들려왔단다, 그래서 여전히 낙심목회 환경에서도 계속 헌신을 할 마음을 갖게 되었단다. 우리가 분명한 죄인인데도 천국에 갈 수 있고, 모든 문제투성이 속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대언자 예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 설교본문도 다윗 왕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한 나머지 찬송시를 길게 지었다는 것인데, 다윗 왕의 찬송시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1.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 다윗 왕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목동으로 살다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발탁되었지만 사울 왕에게 지긋지긋하게 쫓겨 다니다 사울 왕이 전사한 후에야 왕위에 올랐고, 그렇지 않아도 다윗 왕은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니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이라는 표현은 다윗 왕의 일생 중에 위험천만한 처지를 말해줌. 그렇다면 다윗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난 일을 셀 수 없이 겪었음을 짐작케 함).

경주하는 말은 양쪽 눈의 뒷부분을 컵 모양으로 가려 놓아서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 그 가리개를 차안대(遮眼帶)라고 한다. 말의 눈은 큰데다 둥글고 얼굴의 양 옆에 붙어있어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범위가 약 3백50도나 된단다. 그런데 말은 큰 체구에 걸맞지 않게 겁이 많아서, 경주할 때 다른 말이 옆이나 뒤에서 따라붙으면 겁을 먹고 한쪽으로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앞만 보고 질주하게 가려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안대는 경주마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소위 명문학교만 합격시키려고 하다 보니 우리나라 중고등 학생들은 문제풀이에 집중하고 있다. 이게 입시 차안대인 것이다. 대학생들은 취업난 때문에 토익문제풀이 영어공부와 자격증이라는 차안대에 채워져 있어 인성교육은 바닥이다. 정치는 어떤가? 국민의 눈에 ‘경제’만 보이게 차안대를 채워놓고 ‘돈을 최고’로 보게 한다. 보릿고개를 없앤 이가 일등 정치가라고 공공연하게 외치잖아요. 그런데 정치 차안대를 벗어버리면 인간다운 도덕성과 정의실현, 인간적인 가치의 문화와 삶의 질이 보이는데도 이러한 보편적 진리를 말하면 ‘부정적인 자’ 아니면 ‘빨갱이’로 몰아세운다. 교회는 ‘오직 예수’ 아니면 ‘오직 축복’이라는 알맹이 설교가 사실은 차안대로 둔갑하여 ‘무엇이라 기록’(눅 10:26)된 성경구절이나 읽고 쓰는 것을 잘한다고 칭찬해서 ‘불통기독교(不通基督敎)’로 둔갑시켜 간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는 많은 차안대들이 자신도 모르게 채워져 있는 게 사실이다.

아기 예수님이 외양간에 태어났을 때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다고 성경이 밝혀준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라고 하셨고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밝혀놓았다. 제한한 것만 보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안타깝게 우기지 말자는 것이다.

자 그러면 앞으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은 차안대를 벗어버리고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다양하게 체험하고 찬송하고 예배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다윗 왕에게 반드시 배워야 할 게 무엇인지 찾아보자.

1) 나의 요새(2-3)

요새는 적군을 막아주는 튼튼한 시설이나 지형조건을 말한다. 다윗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된 전투를 가리킨 게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지형조건일 수 있고, 기후변화, 전술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러한 보호하심을 2절 3절에서만 ‘나’라는 말을 12이나 사용하면서 ‘반석’, ‘방패’, ‘망대’, ‘피난처’ 등등 8가지로 표현함으로, 다윗 왕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다양하고 예상 밖이었는지 그리고 그 기쁨을 성경독자들에게 맛보게 충동시키고 있다. 다윗 왕의 이런 체험은 하나님의 뜻에 얼마만큼 순종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다른 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면서 기도든 봉사든 정성껏 끈질기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은 무조건 끈질기게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게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아무리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인식하는 게 더 먼저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일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경에 어긋난다면 하나님은 보류하시기 쉽다. 물론 삶이 어긋나 있어도 하나님을 시인시키기 위해 응답하심을 성경은 많이 보여준다. 그럴지라도 기도하는 일과 삶을 성경으로 점검해 보는 게 믿음수준이다. 그렇지 않으면 응답될 수 없는 기도를 주님께 떼쓰게 된다. 이게 중언부언기도인 것이다. 중언부언(βατταλογεω vain repetition, empty)이란 말은 의미 없다는 뜻이다. 중언부언을 기도생활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멘.

2) 아뢰며(7)

‘아뢰다’(קרא to cry for help, shout, to call together. 기도!).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라고 반복한 것은 강조하기 위한 히브리인의 표현법인데 언제 아뢰었는지 그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환란 중에서’ 어느 정도 환란이었는가?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라고 했다. ‘불의’(בליעל worthlessness, wickedness, injury, destruction. 상처를 내고 목숨을 끊어놓은 홍수가 밀려오는 때. 우리 선조들은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고 표현했음. 그토009록 어려운 처지 때마다 다윗은 기도하였고 우리 하나님은 응답해주셨다는 것!). 기도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은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렇지만 기도를 생략하는 교인들은 수두룩하다.

일본 프로야구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3천 안타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선수가 장훈이란다. 수많은 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본귀화를 거부한 일화도 유명하다. 장훈이 귀화문제로 흔들리자 “편하게 살자고 조국을 버리는 그따위 짓을 하려면 당장 야구를 때려치우고 돌아와라!” 이렇게 뜨거운 민족의식으로 정신을 차리게 한 분은 박순분 어머니였단다.

장훈이 자신의 뿌리를 끊지 않자 일본인들은 미워하기 일쑤이었단다. 어느 날 장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조센징은 돌아가라’는 비난이 순식간에 관중의 함성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장훈 선수는 대기석으로 들어가 버렸다. 관중석이 잠잠해지자 장훈이 다시 나타나서 “나는 조선인입니다. 그런데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라고 외치고는 공을 쳤는데 장외홈런이었단다.

지금도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마귀의 음성이 들리나요? 하나님이 자녀란 확신을 갖고 마음속에 찾아온 응어리를 하나님께 쏟아내 보세요. 장외홈런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 체험해 보길 축복한다. 아멘.

3) 캄캄하였도다(10)

‘캄캄하였도다’ 이 말씀은 분별할 수 없는 어둠을 말해준다. 그런데 본문을 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강림하셨다고 했고, ‘불’이 타고 있다고 했다(9). 그런데 어떻게 캄캄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다윗 왕이 캄캄하게 보았던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모세의 설교에 답이 있다(신 4:10-11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흑암이 있는 곳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경계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흑암은 조명의 밝기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단절을 의미하는 죄악세력임을 보여준 것이다(요 12:46, 35).

그림자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마냥 신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자가 끊임없이 자기를 따라다니는 게 무서워져서 엄하게 ‘저리 가!’하며 쫓기도 하고 빠르게 도망치기도 했지만 그림자는 여전히 자신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소년은 엄마에게 찾아가 물었다. “엄마, 그림자를 벽에 부딪치게 하면 쓰러질까? 물속에 빠뜨리면 죽을까?” 어머니는 딸의 순진한 생각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과학적인 사실로 설명해주기보다 이렇게 대답해주었단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그림자는 물에 빠지지도 않고 벽에 부딪치지도 않기 때문이야. 태양만 나타나면 그림자는 따라다닌단다.”

태양은 확실하게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태양의 방향과 높이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도 크기도 바뀌고, 태양이 똑바로 위에서 비추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하나님과의 관계, 각도에 따라 그림자는 귀찮게 따라다니곤 한다. 깨닫게 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자신의 신앙신호등으로 비춰주신 말씀을 확인해 보자. 오늘 설교말씀은 다윗 왕의 찬송시인데, 다윗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수없이 다양하였고 구사일생 같은 기적들이 기도응답으로 이루어졌고 그 체험을 할 때 하나님과 관계를 가로 막는 죄의 실제를 보았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다윗 왕처럼 찬송하는 신앙생활의 그 수준에 이르러 날로 새로워지길 축복한다. 아멘.

최근 게시물
bottom of page